숏버스, 조너선 무니한 남자가 개조한 숏버스를 타고 미국 전역을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보충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 남자에게는 읽기 장애가 있었다. 12살까지 글을 읽지 못했고 학교에서는 골칫덩어리였다. 숏버스는 특수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셔틀버스이다. 남자는 읽기장애를 극복하고 브라운 대학을 졸업하고 강연을 다닌다. 어느 순간 숏버스 여행을 결심한다.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 까지 책 속의 남자도 갈팡질팡하였고, 나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장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처럼 보였다. 장애들 말이다. 남자는 극복한.
이 책에는 각종 (소위 말하는) 장애가 나온다. 성동일성 장애,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발달 장애, 읽기 장애, 청각 장애, 아스퍼거 장애. 남자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이러한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만난다. 이 책이 문제 삼고있는 바는 꽤 명확하다. 장애를 장애로 대하고, 극복해야할 그 무엇인가로 대하는 그런 사람들의 자세. 정상이라는 기준은 무엇인지, 이러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지역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루는 데에 장애를 극복한 주인공의 배경은, 책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해 줄 수 있는 요소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너무나 역설적이다. 그러니까, 어쨌든 사람이라면 제도권 교육에서 인정받는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는 결론이 되기가 너무 쉽기 때문이다. 나는 읽으면서 이렇게 제도권이 인정하는 성취를 이룬 사람의 말이 아니라면, 누가 이 목소리에 귀를 귀울여 줄까 하는 생각때문에 사실 책을 대충 읽었다. (게다가 내가 알고싶었던 건 읽기 장애가 어떻게 극복되는가 였다고! 그게 궁금했다고!)
오랫동안 나는 모든 문제가 사라져 우리가 괴로운 경험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존이, 내가, 켈리가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지난날의 상처를 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가 단순히 상처의 총합, 상처에 대한 반응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자아가 있음을 믿고 싶었다. 우리의 어떤 것이 초월적인 것이기를, 우리가 단순히 뇌나 전자의 작용에 의한 존재가 아니기를, 손상과 결함의 집합체가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존은 병원을 나오면서 달라진 것 같았다. 그는 고장난 머리와 함께 달라진 삶과 미래를 갖고 병실을 나셨다.특히 나는 우리가 '뇌나 전자의 작용에 의한 존재'이며 '우리의 어떤 것이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과 너무 친했기 때문에. 때로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가능한 한 이번 여행을 길게 늘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내가 더 이상 지평선을 좇지 않는다면, 고난을 극복한 영웅이 아니라면, 그렇나면 내가 누구인지 아직 그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후반부에 가면서 조금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비록 저자가 그러한 성취를 이루긴 했지만, 그의 자아에서 성취가 차지하는 부분과, 장애가 차지하는 부분은 통합되지 않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고 대체로 여전히 장애가 차지하는 부분은 부정되고 있었다. 극복에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진다면, 그만큼 장애는 결국, 부정되어야 하는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마침내 아버지가 수화기 너머에서 말했다. "알고 있지?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사람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평범한 결론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몹시 힘든 결론일 것이다.
"네, 좋은 책을 쓸 수 있으면 좋겠네요. 사람들이 좋아했으면 해요." 나는 그런 것들이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는 일들이라고 생각했다. 브라운 대학교, 책 저술, 성취와 같은 것들.
"그게 아니다.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구나.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한 거다."
(중략)
나는 멀리 바다쪽에 서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에 관해 그렇게나 잘못 생각했던 것인가? 지금까지 나는 내 가치가 성취에 있다고 믿어 왔다. 숏버스 여행이야기의 핵심은 내가 장애를 극복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지평선을 좇아 이번 여행을 시작했는데 이제 그 지평선은 사라져버리고 나는 버스에 혼자 남겨져 있었다.
별로 감동적이거나 큰 깨달음은 없었다. 장애를 가진 존재가 지역공동체에 있어도 공동체는 그를 포용할 수 있어야한다는 얘기였고 그들은 다양성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거나, 여튼 그외에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이야기는 와닿지 않았다. 미국 지역사회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그러한 존재에 대한 관용도 없어졌다고 저자는 이야기하지만 딱히 그래보이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 나라도 동네 미친년, 동네 바보가 마을 마다 한 명씩은 있었고 사람들이 그러한 존재를 그냥 받아들였었지만 근대화 이후에 그러한 존재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과 같다.) 저자 스스로도 고백한다. 축구선수이던 시절 왜소하고 다소 여성스러웠던 다른 학생을 게이라고 놀리고 괴롭혔다고. 뭔가 다른 것에 대한 배척은 거의 본능적이라고 보는 게 맞다. 다만 교육과 상식으로 완화될 뿐이다.
저 위에 언급한 수많은 장애들. 진단명의 기준에 대해서도 저자가 언급한다. 그리고 사람을 그렇게 진단하고, 나누어서, '장애'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암암리에 문제삼고 있다. (그러한 장애로 진단 내리는 기준이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왔다갔다하고, 현재도 모호한 기준이 많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문제점은 내부적으로도 언제나 논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우울 장애 등은 '과거에는 질병이 아니었던 것을 괜히 질병으로 규정해서 사람들을 병자로 만든다'는 이야기를 끊이 없이 듣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증상이 (심지어는) 약물로 상당부분 완화되기도 해서 우리가 단순히 뇌나 전자의 작용에 의한 존재가 아니며 더 초월적인 무엇인가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좌절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읽으면서 그럼 제도권 교육은 도대체 어떠해야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내려 놓을 수 없었다. 분명히 학교에는 그런 존재들이 있다. 제도적으로 규범화된 배움에 취약한 존재들. (이유는 다양하다.) 제도권 교육은 이러한 존재를 끊임없이 못살게 굴고, 좌절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공간일 뿐인지. 다른 교육의 길이 있는 것인지 해답을 알고싶었지만 그에 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장애아동 통합교육을 이야기 할 때 많이 거론 될 책으로 보인다. 학교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하는 문제와 연결 된다. 사칙연산을 배워야 하는가, 혹은 자신과는 조금 다른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가. 후자 또한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고매하신 분들께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학교에 있는 중생들까지 그걸 체화하고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할 수 없다. 책에서 이야기 하듯 장애도 정상의 범주에 들어간다. 당연히, 생물에겐 그 정도의 변산이 있을 수 있다. 있는 쪽이 정상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장애아동을 놀리고 괴롭히고 저능하다고 욕하는 개체도, 당연히, 정상의 범주에 들어간다. 안타깝지만 그런 개체가 없는 쪽이 비정상이다. 학교는 정말로 사회의 축소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 정말 저열한 나의 일부분인데. 나는 이런 식으로 그런 다름을 가진 이들이 특별하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서 그럼 나는? 제도권 교육을 무리없이 이수한 나는? 주변에 특별한 영감이 되지 못하는 그저 평범한 나의 가치는 뭐냐는, 정말이지 저열하기 짝이없는 열폭을 했다. 다르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다. 이 책은 다르다는 것의 긍정적인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거기에 많은 특별함을 부여하고 있다. 왜 장애 형제자매가 있는데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엄마가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이는 정말 우리 가족에 큰 선물이자 축복이라고 얘기할 때의 나머지 형제자매가 된 기분이라는 거다. 엄마 그럼 나는? 나도 안다. 이게 저열하다는 거. 내가 위에서 시큰둥 했던 것은 어느정도 이런 감정이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어느정도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밝혀둔다.
마지막으로 장애라는 말에 얽힌 에피소드를 하나 이야기 하겠다.
일전에 친구가 요새 성질을 엄청 냈다가 기분 좋아했다가... 조울증이라도 걸린 것 같다고, 성격 장애인 것 같다고 농담조로 얘기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건 성격 장애는 아냐."
라고 대답했고
친구는
"그럼 뭐야?"
라고 되물었다.
"그냥 장애야"
그 말에 나와 내친구는 빵터지고 말았다.
보충 설명을 하자면 조울증 (양극성장애)는 기분 장애에 속하는데, 성격 장애는 또 따로 있다. 배운지 오래 돼서 기억이 잘... 종류가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기분 장애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나는 그만...
제일 처음에 나열한 진단명에서 상당수의 장애라는 말은 영어로 disorder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번역하면서 장애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으아니 의사양반 무슨소리요. 내가 장애인이라니! 이런 시추에이션이 되기 더 쉽다. 저 위의 장애인이란 단어는 딱히 장애인을 비하하려는 의도로 쓴 건 아니다. 그런데 어감이 미묘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게 아마 내가, 우리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장애에대한 인식, 편견의 소산일 것이고, 사라지려면 오래 걸릴 것이다.
삼천년만에 책 한 권 읽어서 자랑하려고 감상썼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세계의 끝 여자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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